미륵사지
■ 익산미륵사지(사적 제150호)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다.
백제 제29대 무왕(600~641 재위) 때 창건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백제의 절로서는 가장 크다.
50,000만여 평으로 황룡사의 두배 크기이다. 백제시대 동양최대의 가람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27권 29 무왕조에,
“무왕 35년(634) 2월에 왕흥사가 이룩되었는데, 그 절을 물에 임하여 짓고, 채색 등은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몄다. 왕은 늘 배를 타고 절로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고 하였다.
또 건립에 걸린 기간을 “數記”라 하였다. ‘수’는 3년, ‘기’는 12년. 그래서 36년 걸려서 지었다.
<삼국유사> 제2권, 무왕조에 다음과 같은 창건 설화가 전한다.
……
어느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한다.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그것을 하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會殿과 탑과 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國史에서는 王興寺라 했다)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을 보내어 그 역사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三國史에는 이 분을 法王의 아들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무왕과 왕비에 관한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璋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을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이름하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모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경주)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서울에 가들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들이 임금께 극력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여 장차 떠나려 하는데, 황후는 순금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하였다. 공주가 장차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도중에 서동이 나와 공주에게 절하며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우연히 믿고 좋아하니 서동은 그를 따라가면서 비밀히 정을 통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가 맞는 것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가 준 금을 꺼내 놓고 살아 나갈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고 말했다.
“이게 무엇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이니 이것을 가지면 백 년의 부귀를 누릴 수 누릴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덩어리처럼 쌓아 두었소.”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그것은 천하의 가장 큰 보배이니 그대는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우리 부모님이 계시는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이다.”
이에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가서 이것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한다.
“내가 신통한 힘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 오시오.”
이리하여 공주가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 앞에 갖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내자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하여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성덕왕 18년(719) 9월에,
“금마군의 미륵사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의 연혁은 자세하지 않다.
조선 태조 7년(1407) 나라에서 여러 고을의 자복사찰을 정할 때 청주의 菩慶寺, 임실의 珍丘寺 등 여러 절과 함께 자복사로 지정된 기록이 있다.
이로보아 이때까지는 절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소실되었다.
조선 정조 때 무장(정읍)의 선비 강후진이 지은 <臥遊錄>에,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100년 전에 무너졌다고 하더라”는 기록이 있다.
그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까지 이곳은 논밭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1980년부터 발굴 조사를 계속하고 있는데, 절터 아래가 뻘흙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에 각각 석탑이 있었으며, 또 각 탑의 북쪽으로 금당이 하나씩 있고 각기 회랑으로 둘러져 있어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이 절의 구조는 특이해서 다른 예가 없다. 마치 세개의 절이 하나로 합쳐진 듯한 三院 一伽藍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확인된 가람배치를 보면 동탑과 서탑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하나씩 있었다.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廻廊이 있어 동쪽은 東院, 서쪽은 西院, 중앙은 中院이라는 개념의 三院式 가람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동양 고대 가람연구에서 밝혀진 바 없는 전혀 새로운 형식의 특수한 가람이다.
미륵삼존을 위해서 창건하였다는 점, 또 미륵불이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용화세계로 이끈다는 교리에 따라 세 군데의 설법처를 마련하느라 이런 형식이 나왔으리라 여겨진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및 동양최대의 미륵사지 석탑이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학에서 실시한 발굴조사시에 동탑지도 발견되었다. 건물지는 백제와 고려의 遺構가 복합되어 있다.
* 당간지주(보물 제236호)는 동서 두 석탑에서 남쪽으로 각각 64m 되는 곳에 한 기씩 두 기가 있다.
높이는 모두 3.95m, 양식과 수법은 같다.
필요한 최소한의 장식만 하여 번잡하지 않고 단정하다.
통일신라 중기 이후의 양식이다.
*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탑이며, 우리나라 석탑 발생의 시원이 되는 탑이다. 평면 방형의 다층석탑이었으나, 그 서남부가 붕괴되어 현재는 동북의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있다. 본디 9층탑일 것으로 추측한다. 탑이 앉은 자리는 한 면의 길이가 10m 되는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14.25m이며 원래의 크기를 추정하면 상륜부까지 합쳐서 26m나 되는 거대한 탑이다.
1층은 4면이 모두 3칸으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가운데 문이 있어 안에서 통한다. 가운데 공간에는 돌기둥이 세워져 전체의 무게를 받치고 있다. 1층 주변의 기둥은 당시 목조 건축의 양식대로 위쪽이 좁고 높이의 2/3되는 지점부터 부풀어 내려오는 배흘림의 수법으로 되어 있다.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 즉 지붕 아래의 처마 부분 또한 목조 건축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 모서리는 가볍게 들렸고 각각 풍령을 달았던 자국이 있다.
각층이 1층과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 졌으나 2층 이상은 높이가 얕아지고 처마 밑부분의 짜임이 간략해 졌으며, 지붕의 폭이 알맞게 줄어들어 전체적으로 정연하고 묵직하면서도, 안정감과 경쾌함, 장중하면서도 단아함을 가지고 있다.
이 석탑은 각부가 작은 석재로서 따로 구성되었고 목조건물 양식을 모방한 형식이다. 목탑적 요소로는 기둥 밑에 주춧돌이 있다. 이는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에 나타난다. 평방, 창방이 있고, 지붕돌 3단 받침은 공포에 해당한다. 또 심주석이 있다. 4층 지붕부터 나타나는데, 석탑에는 유일한 것이다. 심주석은 기준을 잡는다.
무왕(600~641 재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탑의 뒷부분은 1915년 일본인이 시멘트로 보수했다.
탑 주위 네 모퉁이에는 수호 석인상이 있다.
2003년 현재 80억원을 들여 해체·보수하고 있다.
탑 남쪽의 H형 돌유구는 기중기 자리이다.
서탑 뒤 금당터는 초석이 높아 누각 같다. 이 지하공간은 미륵(미르-용)이 용이 드나는 공간이다. 물길도 있다. 용수와라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용은 늪에 산다. 미륵은 용의 화신이다.
* 동탑은 1993년 컴퓨터로 계산해서 복원하였다.
화강암 1,000여톤이 들었고, 34개월이 걸렸다. 높이는 28m이다. 노반석을 발견함으로서 복원이 가능하였다.
* 못을 메우고 47단의 판축을 쌓아 목탑을 세웠다. 좌우 석탑 높이의 2배이다.
* 가운데 금당은 2층이다. 바깥 것의 2배 크기이다.
* 강당은 총 400명 수용의 크기이다. 승방 하나에 10명 수용. 10개의 승방이 있었다.
* 미륵사 유물전시관
1997년 5월 개관하였다. 80년에서 96년까지 17년에 걸려 발굴한 유물 1만 8천 710점 중 427전 전시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녹유기와도 있다. 이는 것이다.
※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은 2000년 11월 2일 정비작업을 하던 중 중금당터 뒤편에서 백제말이나 통일신라초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국보급 금동향로가 출토되었다. 높이 29cm, 너비 30cm로 몸체와 뚜껑으로 나뉘어 있다.
뚜껑에는 8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문양이 양각되어 있고, 4개의 구름문양이 투각되어 있다. 몸체에는 사자 형상의 다리 4개가 달려있다. 다리 사이에는 귀면의 손잡이가 달려있다. 4개의 다리가 있는 것은 매우 희귀하다.
미륵사는 삼원 병렬식 가람이다. 동탑과 중원의 목탑을 비롯한 가람 대부분이 소실되고 서탑인 미륵사지석탑만 일부 남아 있던 것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01년부터 해체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맨 아래층의 심주석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사리장엄이 일괄 수습된 것이다. 동탑과 목탑 자리에서는 사리장엄이 발굴되지 않았다. 또 서탑에 지렛대 자국이 남아 있는 등 도굴을 시도한 흔적이 남아 있는 사실도 확인됐다. 배병선 미륵사지석탑 정비·보수단장은 “사리공 위를 1.2t가량의 돌로 막고 회로 봉해 1400년 전의 유물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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