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법주사
■ 속리산 법주사는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에 있다.
1) 창건과 전개
1. <法住寺史蹟記>에 “신라 제24대 眞興王(540~576 재위) 15년(554)에 백제를 크게 파하여 충주로 小京을 삼고 귀족 자제 및 육부 호민을 옮겨 살게 하였는데, 이해에 절을 짓고 장육상을 주성하였다. 그후 진흥왕이 소경을 순수하다가 사불산 대승사 및 법주사의 미륵전에 행차하여 장육금신상을 예배하니 대중이 만세를 불러 山呼殿이라 이름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1-1. 또 창건설화에는 義信和尙이 천축으로 구법여행을 갔다가 돌아와 나귀에 불경을 싣고 절 지을 터를 찾아 다녔는데, 이곳에 이르자 나귀가 더 가지 않고 제자리를 맴돌므로 주변을 살펴보니 절을 지을 만하여, 진흥왕 15년에 이곳에 절을 짓고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에서 法住寺라 했다 하였다.
1-2. <법주사사적기>라는 책은 정유재란으로 법주사가 불탄 후 그 중창을 끝낼 즈음인 조선 제16대 인조 3년(1625)경에 처음 지어, 이후 제19대 숙종 16년(1690), 제21대 영조 13년(1773), 제23대 純祖 4년(1804), 제26대 고종 11년(1874)으로 이어지면서 고쳤다.
<법주사사적기>의 기록은 <삼국사기> 진흥왕 본기 15년조에서 19년조의 기록을 요약한 것이다. 진흥왕이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新州군주 金武力을 보내 삼년산성을 치고 백제 제26대 聖王(523~554)을 죽인 것은 왕 15년(554)년이고, 國原(충주)으로 소경을 삼은 것은 왕 18년이며, 귀족 자제와 육부 호민을 옮겨 살게 한 것은 진흥왕 19년이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이 법주사에 행차했다는 기록은 없다. 진흥왕의 법주사 행차 기록은 숙종 31년(1705) 碧天이 지은 <四佛山大乘寺寺蹟記>의 법주사 관계 기록만 뽑아 보탠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들은 모두 숙종 31년 이후 윤색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기록들이 서로 맞지 않는다.
의신조사에 관해서는 신라의 고승이라고만 전할 뿐 자세한 기록은 없다.
1-3. 창건설화의 “나귀에 불경을 싣고 ……”라는 것은 중국의 불교 초전에 관한 설화를 인용한 것이다. <後漢書-西域傳>에 후한의 제2대 顯宗 明帝(28~75)가 꿈속에서 金人을 보았는데, 그 금인이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고 사절을 서역으로 보내 불법을 얻어오도록 하였다. 도중에 백마에다 경전과 불상을 싣고 오는 迦葉摩騰과 竺法蘭 두 사람을 만났는데, 영평 10년(67) 그들과 함께 도성으로 돌아왔다. 명제는 크게 기뻐하여 국도 낙양성문 밖에 白馬寺를 짓고 그를 거기에 머물게 하였으며 이곳에서 <四十二章經>이 번역되었다고 한다.
1-4. 진흥왕 당시 이곳에 왕이 행차할 만한 대찰이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과거 삼국시대 삼국의 세력은 늘 이곳에서 부디쳤다. 백제가 한강유역까지 장악하였을 때는 백제 영토가 되었고, 고구려가 남진하면서는 고구려의 남쪽 변경이 되었으며, 신라가 한강으로 진출하면서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쟁패의 요충지가 되어 항상 시달려야 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군사 목적에 필요한 작은 암자의 건립은 있었을 것이다.
2. 신라 제33대 聖德王(702~737 재위) 19년(720)에 중수하였다.
3. 신라 제36대 惠恭王(765~780 재위) 12년(776) 眞表律師의 지시로 대덕 永心이 중창하여 대찰이 되었다. 신라 통일 이후 백제 유민의 지도자였던 진표율사가 끊임없는 전화로 피폐한 이곳 백성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占察敎法을 펼칠 제2후보지로 삼으려 한 것이다.
<삼국유사> 제4권 關東楓嶽 鉢淵藪石記에,
율사가 敎法을 받고 금산사를 세우고자 …… 미륵장육상을 만들고, 또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법을 주는 모양을 금당 남쪽 벽에 그렸다. 상은 甲辰년(764) 6월 9일에 완성하여 丙午년(766) 5월 1일에 금당에 모셨다.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牛車를 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소들이 율사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우니 수레에 탄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와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분입니까.” 율사는 말한다. “나는 금산사의 중 진표요, 나는 일찌기 변산의 不思議房에 들어가 미륵·지장 두 보살 앞에서 친히 戒法과 眞性을 받았기 때문에 절을 지어 길이 수도할 곳을 찾아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은 겉은 어리석은 듯하지만 속은 현명합니다. 내가 계법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 말을 다 듣고 나더니 말하기를 “짐승도 오히려 이러한 신심이 있는데 하물며 나는 사람으로서 어찌 무심하겠습니까.” 그는 곧 낫으로 자기 머리털을 잘라 버렸다. 진표율사는 자비한 마음으로 다시 그의 머리를 깎아주고 계를 주었다.
이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吉祥草가 난 곳을 표해 두었다. 그들은 溟洲(강릉) 해변으로 돌아와 …… 고성군에 이르러 금강산에 비로소 발연수(사)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여기서 7년 동안 살았는데, 명주 지방에 흉년이 들어 …….
율사는 발연수에서 나와 다시 부사의방에 이르렀는데, 그 후에는 고향으로 가서 그 아버지를 뵙기도 하고 혹은 진문대덕의 방에 가서 살기도 했다.
이때 속리산의 大德 永心이 融宗, 佛陁와 함께 진표율사를 찾아와 청했다. “우리들은 천리길을 멀다하지 않고 외서 계법을 구하오니 法門을 주시기 바랍니다.” 율사가 잠자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으니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 위에 올라가 거꾸로 땅에 떨어지면서 맹렬히 참회했다. 이에 율사가 敎를 전하여 灌頂(부처가 授記하는 의식으로 정수리에 물을 붓는다)하고 드디어 가사와 바리때와 <供養次第秘法> 1권과 <占察善惡業報經> 2권과 簡子 189개를 주었다. 다시 彌勒眞性 여덟째 간자와 아홉째 간자를 주면서 경계했다. “여덟째 간자는 新熏成佛種字요 아홉째 간자는 법이다. 내가 이미 너희에게 주었으니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그 산에 길상초가 난 곳이 있으니, 거기에 精舍를 짓고 이 교법에 의해서 널리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을 건지고 후세에까지 전하도록 하라.”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바로 속리산에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吉祥寺라 했다. 영심은 여기서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3-1. 위의 기록으로 보아 진표율사가 처음 속리산을 찾았을 때는 주변이 너무 피폐하여 대찰을 지을 형편이 못되므로 그 터만 잡아놓고 제자 영심, 융종, 불타 들에게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동해안 포교를 성공하여 동서의 협력으로 대가람 창건이 가능해지자 그 제자들을 불러 전법의식을 베풀고 그들로 하여금 길상사를 창건하게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3-2. 이로보아 영심이 창건한 길상사가 곧 법주사이다. 진표율사가 창건한 금산사, 금강산 발연사, 헌덕왕의 왕자 心地가 영심으로부터 진표율사의 의발과 법구를 전수받고 개창한 동화사 등 모두 진표율사의 법맥을 이은 절이다. 이 절들은 고려시대를 통해 慈恩宗(法相宗)의 중심 도량이었다. 또 법주사는 금산사와 같이 장육미륵존상을 봉안하고 있다. 진표율사의 법맥을 이은 이곳 법주사는 점찰교법에 의해서 장차 미륵하생의 도량으로 약속받은 곳이기 때문에 금산사 모양으로 초창기부터 미륵장육존상을 봉안하였다.
장육상이란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석가모니 당시 보통 사람의 키는 8尺, 석가의 키는 그 배인 1丈 6尺이라고 한다. 1척은 30.3cm이고, 1장은 10척(3.03m)이다. 1장 육척은 4.8m이다. 부처의 입상을 만들 때 이를 기준해서 장륙상이라 한다. 곧 부처의 등신상이다. 좌상의 경우 대략 그 3/5, 곧 9척으로 조성한다.
※ 진표율사(734~?)
완산주 만경현 사람이다. 아버지의 성은 井씨 이름은 眞乃末이다. 내말(奈末, 柰麻)은 신라의 11등 관직명이다. 신라가 백제를 정복한 후 잔존한 백제 유민 귀족에게 관직을 나누어 줄 때 백제의 3등급인 恩率에게 등급을 낮추어 내말의 직을 주었다. 따라서 진내말은 은솔의 지위에 있었던 백제의 일급 귀족 출신으로 김제, 만경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던 백제 유민의 통솔자였을 것이다. 眞씨는 백제의 귀족 성씨 중의 하나이다. 성이 井씨인 것은 그가 벽골군 都那山村(지금의 만경면) 大井里 출신이라는데 근거하여 후일 조작하였을 것이다.
진표는 어릴 적부터 활을 잘 쏘고 사냥을 잘했다. 어느해 사냥을 갔다가 쉬면서, 집에 가지고 가서 구워먹을 생각으로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코와 입을 꿰어 물에 담가놓았다. 그러나 사슴을 쫓다가 다른 길로 돌아오는 바람에 개구리 잡아 놓은 일을 잊고 말았다. 다음해 우연히 다시 그곳을 지나던 그는 버들가지에 꿰인 채 울고 있는 개구리들을 보았다. 깊은 자책에 싸인 그는 개구리들을 풀어주고 출가의 뜻을 품게 되어 금산사의 順濟법사(혹은 崇濟법사)에게로 가 머리를 깎았다. 그의 나이 열두 살 때였다. 그는 순제법사로부터 지장삼부경의 하나인 <占察善惡業報經> 두권을 얻은 다음 17년 동안 육신의 고통을 극한으로 몰아가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해 신앙적 확신을 얻는다.
스물일곱살 때 그는 변산의 仙溪山 不思議庵으로 들어갔다. 미륵상을 모시고 3년 동안 법을 구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자, 절망한 그는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때 어디선가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그를 받아 도로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다시 결심을 다진 그는 삼칠일을 기약하고는 온 몸을 바위에 내던지는 懺悔行으로 간절히 법을 구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손과 발이 부러져 떨어져나갔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지장보살이 나타나 그의 손과 발을 도로 붙여주고 가사과 발우를 주었다. 드디어 삼칠일이 되는 날, 그는 천안을 얻어 도솔천중이 오는 형상을 보았다. 이때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간절한 참회구법을 칭찬하고 각각 그에게 계본과 木簡子[점대] 두 개를 주었다.
두 보살로부터 교법을 전해받은 진표율사는 산을 내려와 금산사를 중창하고 속리산을 거쳐 강릉으로, 다시 금강산으로 옮기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중생 교화에 힘썼다.
경덕왕은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보살계를 받고 많은 재물을 보시했다. 진표는 그것을 여러 사찰의 불사에 썼다.
이러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宋高僧傳>-송나라 贊寧이 988년에 지음. 14권 明律 百濟國 金山寺 眞表傳-을 비롯한 여러 기록을 합쳐 정리한 것이다. 각 기록마다 구체적 내용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가 신라 성덕왕때 태어나 제35대 경덕왕(742~765)때 구도에 전념했으며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계법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느 기록에도 나타난다.
점찰법회는 <占察經>과 선악의 종류를 적은 189개(또는 108개)의 나무조각인 목륜을 던져 그 결과를 보고 전생의 업을 알아 참회정진하는 참회법회이다. 불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 불교의 참회법에 고대로부터 행해졌던 주술과 점복이 결합된 의식이다.
진표의 점찰교법은 백제 복구의 희망 사라져 절망한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백제 미륵사상에 지장사상을 결합하여 백제 미륵신앙의 전통을 살리면서 신라 미륵신앙과 조화를 꾀한 것이다.
백제 사람들은 백제가 미륵불 하생의 땅으로 선택되기를 희망하여 미륵사를 짓고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미륵신앙을 뒤늦게 전수해간 신라가 화랑도로 이를 실현시켜 삼국통일의 원동력으로 삼고 불국토를 실현했다. 그리하여 백제는 신라에게 망하여 그 지배 아래 들어가자 백제 유민들은 깊은 절망감과 좌절에 빠졌다.
미륵의 하생처라 생각했던 익산 미륵사 주면 일대가 그 절망감이 더욱 심하였을 것이다. 이곳은 백제 땅에서 가장 큰 곡창지대로 일찍부터 벽골제가 경영되어 쌀의 생산이 많았던 곳이다. 그러므로 망국 이래 신라 조정의 수탈이 심하여 이곳 백제 유민들의 고통은 더욱 컸다. 이런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들을 절망에서 구제하여 확실한 희망을 주기 위해 진표율사는 점찰교법을 편 것이다.
진표율사는, 먼저 미륵이 이곳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과거에 지은 죄업이 두텁기 때문이니 참회를 통해 그 업장을 소멸시켜야 하고, 그런 다음에는 미륵회상에 동참하여 복락을 누릴 수 있는지 점을 쳐서 알아보고, 그에 대응하는 선행과 정진을 쌓는다면 항상 복락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쳤다.
법상종이 진표율사에 의해 성립된 종파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진표는 자은 법상의 유식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점찰참회교법이라는 독특한 신앙체계를 확립한 인물이다.
3-3. 그후 어느땐가 길상사는 법주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부식의 <속리사점찰법회소>, <동문선>에 실린 朴孝修의 시, 조선 전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속리사라는 이름이 나온다.
고려 제24대 元宗(1259~1274 재위) 때 사람 慈淨國尊의 비가 청동미륵대불 뒤 언덕에 있는데, 이 비에 처음으로 법주사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이 비는 고려 제28대 忠惠王(1330~1332, 1339~1344 재위) 복위 3년(1342)에 세웠다.
3-4. 대덕 영심이 주석한 이래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8차례 중수를 거쳐 큰절로 성장하였다.
금산사, 동화사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3-5. 영심은 제자로 釋 心地가 있다.
<삼국유사>의 心地繼祖의 기록에 따르면 심지는 신라 제41대 흥덕왕의 아들로 15세에 출가하여 동화사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속리산에서 영심이 불골간자를 받아 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간자 두개를 받아와 팔공산으로 돌아와 이를 묻고 동화사를 크게 중창했다 한다.
3-6. 미륵보살이 간자를 통해 진표에게,
진표는 그것을 영심에게, 영심은 다시 간자를 심지에게 전함으로써 3대에 걸친 師子相承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고려 태조(918~943 재위) 1년(918) 왕사인 증통국사가 중건했다.
5. 제12대 肅宗(1095~1105) 6년(1101)에는 문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대각국사 의천의 아우인 道生 僧統이 법주사에 주석하였다. 숙종이 그의 아우 의천을 위하여 仁王經會를 열었다.
6. 제17대 仁宗(1123~1146) 때는 왕이 이자겸 일파에게 죽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고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점찰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로보아 법주사는 법상종의 중심이며 신라 이래로 점찰법회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7. 제31대 恭愍王(1351~1374)은 왕 11년(1362)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으로 피란갔다 환궁하던 중 이곳에 들러 통도사로 칙사를 보내 석가모니 사리 한과를 가지고 오게 하여 법주사에 모시게 하였다. 금강문 서쪽 사리각에 있는 사리탑이 그때 사리를 봉안한 탑이라 한다.
8. 조선 태조(1392~1398)는 즉위하기 전 상환암에서 백일기도를 드렸고, 병에 걸린 세조는 복천암에서 사흘동안 기도를 올렸다.
9. 제14대 宣祖(1567~1608) 30년(1597) 정유재란(1597) 때에는 충청도 지방 승병의 본거지여서 왜군의 방화로 모조리 불탔다. 그후 四溟대사 惟政(1544~1610)이 중건을 주도하여 선조 35년(1602) 팔상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제16대 인조 4년(1626)까지 주요 전각과 요사를 복원하였다.
10. 1990년 청동미륵대불과 기단 아래 지하석실 법당 용화전을 건립하였다.
2) 법주사의 구조와 문화유산
1. 일주문에는 “湖西第一伽藍”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일주문을 지나 왼쪽으로 계곡을 끼고 오리숲이라는 이름의 숲길을 지나 수정교를 건너면 곧 넓은 터가 나온다. 이곳에 속리산 사실기비, 碧巖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가 있다. 오른쪽으로는 산내 암자들과 문장대, 천왕봉으로 오르는 넓은 등산로가 있다.
※ 碧巖대사 覺性(1575~1660)
자는 證圓, 호는 벽암이다. 속성은 김씨로 충북 보은 사람이다. 그 선조들은 역대로 벼슬을 했다. 그는 經史百家에 통하였고, 초서·예서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선조 8년 12월에 태어났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0세에 華山에 들어가 雪黙長老에게 출가하여, 14세에 寶晶大師에게서 삭발하고 具足戒를 받고 경전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때 浮休대사 善修(1543~1615)가 화산으로 들어오자 그는 부휴대사를 스승으로 삼고 그를 따르기 시작하여 평생 그림자처럼 따랐다. 부휴대사를 따라 속리산,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 등지의 명산을 편력하면서 함께 수행하였다. 조일전쟁으로 부휴대사가 전쟁에 참가하자 그도 해전에 참가하였다.
선조 33년(1600) 지리산 칠불사에서 하안거를 하고 있을 때 부휴대사가 병을 앓게되자 講席을 그에게 물려주었다. 丙午년(1606)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속리산 가섭암에 들어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제15대 광해군 4년(1612) 스승 부휴대사가 못된 중의 무고를 입어 그도 함께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광해군이 친히 이들을 치죄하고 그의 위의에 감복하여 하사품을 내리고 방면하였다. 당시 부휴, 벽암을 대불, 소불이라 불렀다.
부휴대사가 산으로 돌아가면서 벽암을 봉은사에 머물게 하고 그에게 判禪敎都摠攝의 직을 내렸다. 광해군 7년(1615) 부휴대사가 입적하자, 부휴를 따르던 무리들과 강석을 그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벽암은 그 자리를 사양하고 칠불사로 옮겨갔다. 1618년 다시 신흥사로 옮기니 대중이 700여명이나 되었다. 벽암은 번거로운 대중을 피하여 밤에 몰래 태백산 箭川洞으로 숨어버렸다.
광해군이 淸溪寺에서 큰 齋를 베풀고 궁궐의 사신을 파견하여 벽암을 모셔와 설법을 듣고 金襴袈裟를 하사하였다.
인조 2년(1624) 후금의 위협이 고조될 무렵 조정에서는 수도 방어선을 남한산성과 강화도에 두기로 결정하고 남한산성 축성 공사를 벌였다. 이때 벽암대사에게 八方都摠攝의 직위를 주어 승군을 이끌고 축성의 일을 맡게 하였다. 공사는 1626년 7월에 마쳤다. 공사를 마치자 나라에서 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직과 의발을 하사하여 그 공을 치하하였다.
인조 10년(1632) 화엄사를 중수하여 대총림을 만들었다. 인조 14년(1636) 조청전쟁이 일어나 청군이 서울에 침입하자 왕은 남한산성으로 천도한다. 이때 벽암은 3000명의 승군을 모집하여 降魔軍이라 이름하고 북상하였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圖中決疑”, “參商禪旨” 등을 저술하였다.
인조 18년(1640) 봄 쌍계사로 들어가 그곳을 수리하였다. 그해 8월 原平府院君 元斗杓가 호남 관찰사로 왔을 때 그의 주청으로 糾正都摠攝의 직을 맡게하여 적상산성에 있는 사고를 보호하게 하였다. 1641년에 해인사로 갔다.
이해 6월 조정에서는 사명대사에게 맡겼던 소임을 그에게 맡겨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려 하였다. 그러나 서울로 향하던 중 병으로 포기하였다. 다시 백운산 上仙庵에 숨어버렸다. 1642년에는 寶蓋山으로 들어가 법석을 베풀었다.
인조 24년(1646) 가을 다시 속리산으로 들어왔다. 동문인 孤閑 熙彦(1561~1647)과 가까이 지냈다. 고한이 화엄사로 돌아가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들어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현종 1년(1660) 1월 86세, 법랍 73세로 입적하였다.
2. 금강문을 들어서기 전 왼쪽에 墜來岩이, 추래암에는 마애여래의상이 있다. 길은 부도밭, 수정암으로 이어진다.
2-1.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은 높이 7m쯤 되는 바위에, 불상의 높이 6.18m로 꽉 차게 새겼다.
나발머리에 낮은 육계가 돋았고 그 가운데 반달 모양의 구슬장식이 있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부은 듯한 눈두덩, 옆으로 치켜진 눈 짧은 인중, 두터운 입술 등 이목구비의 표현이 뚜렷하고 날카롭게 조각되어 있다. 눈썹 사이에 백호가 있고, 목에 표현된 삼도는 목도리를 두른 듯 두껍다.
어깨는 수평으로 반듯하고 팔과 어깨도 거의 직각을 이루었다. 손은 설법인이다. 얼굴과 어깨, 팔까지는 당당하게 표현되었으나 가슴쪽에서부터 갑자기 줄어들어서 허리께는 완전히 잘록해졌다. 두 무릎은 바깥으로 활짝 벌어져 직각을 이루었다.
우견편단의 법의는 왼쪽 어깨에 걸쳐 몸을 한바퀴 감싼 다음 다시 왼쪽 어깨로 넘겼다. 옷단이 왼쪽 어깨 앞에서 너울져 있고 옷주름은 가슴 아래에서 두 다리 사이로 반달 모양 곡선을 그리며 드리워졌다.
두 다리는 의자에 걸터앉은 듯 늘어뜨린 모습이다. 이런 倚坐像은 경주 삼화령 미륵삼존상(국립경주박물관)이 있다. 앉은 자리는 활짝 핀 연꽃으로 감싸였다. 발 아래에는 둘레에 연꽃잎이 새겨진 둥그런 받침이 있고 무릎과 발 바깥쪽에 각각 연밥이 표현되었다.
2-2.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와 ㄱ자로 잇대어진 바위 위쪽에는 높이 3.13m의 지장보살상이 있다.
깎은 머리에 얼굴은 둥그스름하다. 왼손에는 보주를 들었으며 오른쪽 다리는 늘어뜨리고 왼쪽 다리는 비스듬히 올려놓은 반가상이다.
이 불상들은 11세기쯤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2-3. 두 바위가 만난 모서리 아래쪽에 틈이 있고 안쪽은 큼직한 석실로 수행장소이다. 바위 꼭대기에 네모진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목조전실이 있었을 것이다.
2-4. 미륵불 왼쪽 아래 짐 실은 말과 사람, 그 앞에 꿇어앉은 소 등의 조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것은 흰 노새에 경을 싣고 와서 법주사를 세웠다는 신라 의신조사의 법주사 창건설화를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견해와, 소들이 진표율사 앞에 업드려 법을 구했다는 설화를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2-5. 추래암은 원래 뒤편 수정봉에 있었는데 제멋대로 자리를 바꾸었다가 산신에게 밉게 보여서 산신이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추래암 위에 삼층석탑이 있다.
3. 금강문 안에는 금강역사와, 왼쪽에 코끼리를 타고 앉은 보현보살, 오른쪽에 사자를 타고 앉은 문수보살이 있다. 두 보살상은 1974년 수리 때 조성한 것이다.
4. 금강문을 지나면 왼쪽에 철당간, 석연지, 석조, 사리각, 능인전이, 오른쪽에 쇠솥, 석옹이 있다.
4-1. 철당간은 처음 고려 제7대 목종 9년(1006)에 주철로 만들어 세웠는데, 높이는 16m쯤 되었다고 한다.
조선 고종 3년(1866) 대원군의 명으로 당백전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순조때(1907) 다시 세웠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총 높이는 22m이다.
철당간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갑사철당간(보물 제256호), 고려 제4대(949~975) 광종 13년(962)에 만든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제41호), 조선 중기의 작품인 안성 칠장사 철당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이 있다.
4-2. 석연지(국보 제64호)는 바닥에 사각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팔각의 받침돌을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원형의 석조를 앉혔다.
지대석 바깥에는 간격을 조금 두고 길다란 석재를 한바퀴 돌렸는데 윗부분의 커다란 석연지와 시각적 균형을 이루어 안정감을 준다. 팔각받침돌 옆면에는 아래위로 넓은 띠를 두고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각 면에 안상 하나씩을 조각하였다. 윗면은 점점 줄어들면서 3단의 굄과 엎은 연꽃잎 한단이 놓였다. 그 위에 짧고 잘록한 기둥돌이 놓여 석연지를 받쳤는데 기둥 둘레에는 피어오르는 구름무늬가 새겨졌다. 이는 연지가 땅에 있는 연못이 아니라 천상의 연못임을 표현한 것이다.
석연지 바깥면에는, 아래쪽에 작은 연꽃잎을 한바퀴 두른 뒤 위쪽에 커다란 연꽃잎을 풍성하게 둘렀고 큰 연꽃잎 안에 다시 보상화(불교에서 이상화한 꽃. 백련꽃을 가리키기도 한다) 무늬를 넣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위쪽 가장자리에는 짧은 기둥을 세우고 둥근 난간을 둘렀으며 아래쪽 난간벽에는 보상화무늬와 천인상을 조각하였다. 둘레는 6.65m, 높이는 1.95m이다.
이런 석연지로는 부여박물관의 부여석조(보물 제194호), 대통사터에 있었던 중동석조(보물 제148호)와 반죽동석조(보물 제149호)가 있다. 지금 공주박물관에 있다.
지금은 능인전 앞에 있으나 예전에는 법주사 중심 건물인 용화보전 앞에 희견보살, 사천왕석등과 한줄로 서있었다. 이것은 최상의 공양인 향과, 등, 차를 미륵불에게 드린다는 뜻이다.
조각수법도 우수하고 제작시기도 8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아 법주사 초창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신앙 절은 연못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김제 금산사, 익산 미륵사는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다는 창건 설화가 있고, 연못 모양의 구조물을 만들어 미륵불전 앞에 놓기도 했다. 공주 대통사 석연지와 법주사 석연지는 모두 미륵불을 모신 용화보전 앞에 놓았던 것이다. 미르(용)에 대한 신앙이 나중에 들어온 미륵신앙과 음이 비슷하여 여기에 습합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4-3. 석조는 물을 저장하는 그릇이다. 높이 1.3m, 주위 둘레가 10.8m이다. 신라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쌀 80가마가 들어간다고 한다.
석조로는 고려시대 만든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보문리 석조(보물 제64호)가 있다.
4-4. 사리각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세존사리탑과 이 탑을 조성하게 된 연기를 적은 세존사리비가 있다.
사리비는 조선 제17대 효종(1649~1658) 1년(1649)에 세웠다.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은 세존사리비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1년(1362)에 세웠다. 당시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경상북도 안동으로 피신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 절에 들렀을 때 사신을 통도사에 보내 세존의 사리 일과를 옮겨와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이중기단 위에 원형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지붕돌을 얹어 석등의 모습이다. 기단부의 사방은 각각 1.6m, 원형 탑신의 둘레가 3m, 전체 높이는 3.4m이다. 복천암에 있는 信眉와 學祖의 부도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4-5. 능인전은 사리탑의 계단을 오르는 곳에 있다.
조일전쟁 이후 중창된 건물로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갈라보살, 16나한상을 모셔 영산전이나 나한전 구실을 하고 있다. 본디 뒤쪽의 사리탑을 예배하는 적멸보궁 역할을 하던 건물이다.
能仁이라는 말은 부처님을 말한다.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널리 이로움을 준다는 뜻에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4-6. 쇠솥은 신라 성덕왕때 주조되었다고 한다.
높이 1.2m(4尺), 지름 2.7m(9尺), 솥 둘레 10.8m(36尺), 두께는 10cm나 된다. 신라, 고려시대 飯僧할 때 사용된 솥일 것이다. 당시 신도 3,000명이 모여 수행할 때 물통과 밥솥, 국솥으로 쓰던 물건이라고도 하고 조일전쟁 때는 승병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4-7. 石瓮은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돌항아리이다.
깊이 10척, 둘레 16척이다. 성덕왕때 만들었다고 하는데, 3000명의 물항아리, 김칫독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쌀 40가마가 들어간다.
5. 천왕문은 조일전쟁 이후 중창되어 여러 차례 중수된 다포계 맞배집이다.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가운데 세 칸은 판문을 달아 출입문으로 쓰고 양쪽 가의 한 칸씩에는 작은 판창을 달았다.
6. 천왕문을 지나면 정면에 팔상전이, 왼쪽에 청동미륵대불이, 오른쪽에는 약사전, 석등, 범종각 요사 등이 있다.
6-1. 팔상전(국보 제55호)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오층목탑이다.
최초의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법주사 초창기에 세운 건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타고 선조 38년(1605)부터 인조 4년(1626)까지 22년에 걸쳐 다시 지은 건물이다.
화강암 기단은 정사각형의 2단 석축으로 건물에 비해 얕은 편이다. 위에 덮개돌을 한 층 얹었다. 기단 사방에는 전각으로 들어 설 수 있는 돌계단이 놓여 있다. 기단은 이 탑이 처음 건립될 때의 것이다. 주춧돌은 막돌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기단 위에 목조로 5층의 탑신을 세웠다. 지붕은 사모지붕이며, 五輪으로 된 조선시대 철제의 상륜이 완전하게 남아있다. 한면이 11m이며 상륜부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22.7m이다.
탑신의 1층은 사방 5칸이며, 한층 올라갈 때마다 양끝이 半칸씩 줄어 5층은 사방 한칸이 되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반칸도 한칸이다. 그래서 1, 2층은 5칸, 3, 4층은 3칸, 5층은 2칸으로 볼 수도 있다.
공포는 1층은 주심포, 2층부터 4층까지는 공포가 기둥 위에 놓이기는 했지만 다포집 양식이며, 5층은 완전한 다포식이다. 2층부터 4층까지는 기둥 사이에 창을 달아 빛을 받아들이게 했다.
내부 하늘기둥[四天柱] 안쪽 바닥 한가운데 心礎石이 있고, 그 위에 꼭대기까지 닿는 心柱(刹柱)를 세웠다. 심주는 목탑구조의 중심에 서는 굵고 긴 기둥으로 심초석 위에 세워 상륜부까지 올라가 상륜부를 받친다. 심주 둘레에 4층까지 닿는 네 개의 하늘기둥을 세웠다. 하늘기둥은 5층을 받친다. 다시 그 둘레에 3층까지 닿는높은기둥[高柱] 12개를 세웠다. 3층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높은기둥 12개가 외부에서 보이는 3층기둥이다. 바깥기둥[邊柱]은 1층을 받친다.
기둥들 사이는 사각 보로 연결하였다. 1층 바깥기둥과 높은기둥을 잇는 퇴보 위에 2층 바깥기둥을 세웠고, 3층은 높은기둥을 그대로 바깥기둥으로 삼았다. 높은기둥과 하늘기둥을 잇는 퇴보 위에 4층 바깥기둥을 세웠다. 이런 목탑의 짜임새는 금산사 미륵전에서도 볼 수 있다.
바깥기둥과 높은기둥 사이에 우물마루(마루를 짤 때 井자처럼 귀틀을 짜고 그 사이를 판을 막아 댄 마루)를 깔았다. 마루는 하늘기둥 밖을 돌아 한단 높게 꾸몄다. 높은기둥과 하늘기둥 사이에 佛壇을 마련하여 불상을 모섰다.
그리고 하늘기둥을 서로 연결하는 네 벽에는捌相圖(八相圖)가 각 벽에 두 폭씩 봉안되어 있다. 팔상도 앞의 불단에는 앞쪽에 오백나한상을 세 줄로 배치하고 중앙에는 각각 본존불상을 모셨다. 팔상도와 불상의 배열은 동쪽에서 시작하여 남, 서, 북의 상생배열이다. 북쪽의 열반상은 목조이고 나머지는 모두 소조이다. 열반상은 인조대의 기법을 보이고, 나머지는 조선 말기의 기법이다. 팔상탱 화기에 1897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때 조성했을 것이다.
팔상전의 내부는,
① 사리를 봉안하는 하늘기둥 안쪽의 공간
② 하늘기둥과 높은기둥 사이의 불상과 팔상도가 있는 공간
③ 높은기둥과 바깥기둥 사이에 있는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목탑은 수행과 예배의 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부 찰주, 심초석의 사리를 중심으로 빙 돌아가면서 네면의 팔상탱화와 불상을 예배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부처 재세시부터 右繞三匝이라 하여 부처님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도는 것이 최상의 예법이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내부는 우요삼잡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목탑 속에서는 석탑이나 전탑과는 달리 예배를 비롯한 각종 의식과 탑의 바깥을 도는 탑돌이 의식도 할 수 있다. 우요삼잡은 뒷날 탑돌이로 발전하였다. 법주사의 석탄일 탑돌이는 무형문화재 103호이다.
특히 남쪽판 내면에 “萬曆二十四年丁酉九月日 倭人盡燒 爲白有去乙任寅十月日化主 …… 乙巳年三月念九日 上高柱 立柱 朝鮮國勝大將 裕淨比丘”라는 명문이 있었다. 만력 24년(사실은 25년)은 선조 30년(1597 정유)이다. 이해 9월에 왜인들이 모두 불태운 후 선조 35년 임인년(1602) 10월에 화주들이 모였고, 선조 38년 을사년 3월 9일에 상고주를 세웠다는 것이다. 또 “朝鮮國勝大將 裕淨比丘”라는 말로 보아 법주사를 재건하는데 四溟대사 惟政이 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명대사 유정과 이 탑지의 裕淨은 글자는 다르지만 음이 같고 조선국승대장이라는 직함으로 보아 사명대사이다. 유정은 裕政, 惟淨·으로 기록된 예도 있다.
또 네 하늘기둥 상부에 짜올린 동서 내목도리 바닥에서 900자에 가까운 먹글씨 상량문이 나왔다. 이 상량문에는 天啓 6년 丙寅(1626)에 상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리탑지에 기록된 을사년보다 21년이나 후에 상량한 것이 된다. 전란 속에서 진행되는 작업이라서 목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다만 을사년에 사리장치만 마친 것인지, 전후 기록의 착오인지는 알 수 없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로부터 5년 후에 복구를 시작하여 3년 만인 을사년에 사리장치를 완성하였고,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21년 만인 인조 4년에 상량을 보게 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사리장치는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있다.
※ 八相圖 : 석가의 생애 가운데 가장 극적인 여덟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① 兜率來儀相 ② 毘藍降生相 ③ 四門遊觀相 ④ 踰城出家相
⑤ 雪山修道相 ⑥ 樹下降魔相 ⑦ 鹿苑轉法想 ⑧ 雙林涅槃想
6-2. 청동미륵대불은 1986년 가을 월탄선사가 대불 조성의 원력을 세워 1990년에 건립하였다.
본디 산호전 자리에 세웠던 시멘트 미륵대불 남쪽으로 10여 미터 옮겨, 원래 높이인 불신 80척에, 석조기단 28척을 보태 전체 높이가 108척(33m)이다. 청동 160톤, 화강암이 1만 3천㎥가량, 예산은 31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불신은 13등분하여 다시 각 등분을 4조각씩 내어 모두 52조각을 용접하여 붙여 올라갔다.
석조기단 아래에는 108평의 석실법당 용화전을 만들고 연등불, 석가불, 미륵불의 3세여래불을 봉안하고 각 벽면에는 미륵의 용화세계를 부조로 새겼다. 그리고 패엽경, 선조 어필, 新法天文圖 屛風(보물 제848호) 등을 전시하고 있다. 신법천문도 병풍은 영조 18년(1742) 觀象監에서 만든 것으로 너비는 451cm 높이는 183cm이다. 1723년 중국에 와있던 선교사 쾨글러가 만든 천문도를 1742년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金兌瑞와 安國賓이 직접 배워와서 국내에서 만든 것이다.
제1폭에는 ‘新法天文圖解說’이란 510자로 된 당시 천문학의 개설이 들어있고 해와 달, 망원경으로 관찰한 다섯 행성이 토성, 목성, 화성, 금성, 수성의 차례로 각각 다른 색깔로 그려져 있다. 제2, 3, 4폭에는 북극을 중심으로 165cm의 원을 그려 북반구에서 보이는 별들을, 제5, 6, 7폭에는 같은 크기의 원 안에 남반구에서 보이는 별들을 그려넣었다. 원 안에는 360도의 눈금을 표시하였다. 모두 300座, 3083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제8폭에는 이 천문도를 그리는데 참여한 관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본디 이곳에는 용화보전이 있었다. 이 법당 뒤쪽에 산호처럼 생겨 산호대라 불리는 바위가 있어서 珊瑚전․산호보광명전이라고도 불렀다. <법주사사적기>에 따르면 용화보전은 앞면 7칸 옆면 5칸의 모두 35칸, 2층건물로 28칸인 대웅보전보다 크고 웅장한 법주사의 중심 법당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보은조에 “절에 산호전이 있고, 금색의 장육상이 안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보아 보아 그 모습은 금산사 미륵전과 비슷했을 것이며, 전각 안에 미륵장육상을 안치하였을 것이다.
용화보전과 이 최초의 미륵장육상은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그 후 인조 4년까지 계속된 중창불사 과정에 다시 금동미륵장육삼존상이 주성되어 산호전에 봉안되었다. 이 미륵삼존상도 고종 9년(1872)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당백전을 만들려고 뜯어갔고, 용화보전도 헐렸다. 그 자리에는 초석과 미륵삼존 연화대석 3개만 남아있었다.
1939년 법주사 주지 石霜과 전라북도 태인의 부자 迦山 金水坤의 발원으로 1백 尺의 시멘트 대불을 조성하는 계획을 세우고 그 일을 조각가 金復鎭에게 맡겼다. 김복진은 1938년 36척의 금산사 미륵대불을 석고로 조성한 사람이다. 공사는 착공되었으나 일제의 세계2차대전에 참전함으로 인한 물자의 통제와 1941년 김복진의 죽음으로 공사가 중단되었고, 가산거사도 1950년에 죽었다. 그리하여 공사는 미완성인 채로 20년 간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 5·16군사혁명 정부의 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대장의 시주로 다시 착공되었다. 설계는 林泉, 기술은 申尙均씨가 맡아 1964년 6월 14일 甲辰(음력 5월 5일) 완성되었다.
그러다가 이 시멘트 불상를 헐고 1990년 청동미륵대불을 건립했다.
창건 당시의 법주사는 미륵신앙의 절로 미륵불을 모신 용화보전을 중심 금당으로 하였다. 그러다가 고려시대로 들어오면서 미륵신앙과 화엄신앙을 아우르는 이중적 신앙체계를 갖게된다. 그래서 대웅보전과 용화보전이라는 두개의 중심을 두게 되었고, 이 두 중심이 팔상전에서 직각으로 교차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고려시대의 사찰의 구조가 이어지는 동시 계속 여러 건물이 지어져 정유재란으로 불타기 전에는 불전이 20여동, 암자가 70군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초창기의 법상종 고유의 배치에, 다른 여러 신앙 체계가 습합되어 대규모 통불교 가람이 되었다.
7. 팔상전 지나면 정면에 쌍사자석등이 있다.
7-1.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은 화강암 통돌을 깎아 만든 사자 두 마리가 석등을 받치고 있다.
전형양식에서 파생된 이형양식으로 중대석(간주석)인 쌍사자를 재외한 모든 구성요소는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전체 높이는 3.3m이다.
널찍한 팔각지대석 위에 얹힌 연화하대석과 쌍사자로 된 중대석, 연화상대석, 화사석, 지붕돌 등을 모두 다른 돌로 만들어 조합하였다.
지대석 옆면에는 각 면마다 테두리가 있고 윗면에는 두단의 굄이 있어 하대석을 받친다. 하대석 굄은 팔각으로 돌려져 있지만, 하대석은 둥글며 조금 작아 보인다. 하대석 옆면에는 연꽃잎 여덟 장을 엎어 새겼고 연꽃잎 안에는 다시 꽃모양 장식이 있다. 이와 비슷한 문양은 합천 백암리석등(보물 제381호), 영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에도 나타난다. 윗면에는 넓은 팔각 굄을 조각하여 쌍사자를 받쳤다.
중대석인 사자 두 마리는 가슴을 서로 대고 마주 서서 머리를 젖힌 채 앞발과 주둥이로 상대석을 받들었다.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한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갈기털과 몸의 근육이 비교적 둔중하고 하대석을 딛고 선 뒷발은 굵고 탄탄하다.
둥그런 상대석 아래 둘레에는 두 단의 팔각받침이 있고 그 위로 연꽃잎 열여섯 장이 두 겹으로 피어올랐다. 아래의 연꽃잎 속에는 반원이 두줄, 위의 연꽃잎 안에는 구슬무늬가 세 개씩 장식되었다. 윗면에는 동그란 굄이 있다.
팔각의 화사석에는 앞뒤와 양옆 네 군데 화창이 맞뚫렸고 창틀에는 군데군데 못구멍이 있다. 화사석이 매우 높고 지붕돌도 전체에 비해 커서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지붕돌 처마는 수평이지만 낙수면이 휘어져 여덟 모서리가 들려 올라갔다. 지붕돌 아랫면에는 2단의 받침과 처마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아랫면으로 번져들지 않도록 하는 작은 홈이 돌려있다.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있고 그 위에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가 얹혀있다.
통일신라 절정기인 경덕왕과 혜공왕 시대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진표율사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양식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국보 제103호, 국립광주박물관 소장)과, 영암사터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보다 크고 조각 수법도 가장 뛰어난 유물로 꼽힌다.
8. 팔상전 왼쪽에 원통보전이 있다.
8-1. 원통보전(보물 제916호)은 앞면, 옆면 3칸의 사모지붕집이다.
처마가 깊어 마치 삿갓을 쓰듯 깊게 숙여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겹처마의 선이 잘 휘어올라 처마의 곡선이 마치 독수리가 두 날개를 활짝 편 듯한 모습이다.
앞면이 옆면보다 두자 정도 더 길어 엄격한 정사각형에서 벗어났다. 정확한 정사각형일 때 생기는 착시현상을 고려한 것이다.
기단은 앞과 오른쪽은 3단, 뒤와 왼쪽은 2단인데 마당이 높아지면서 아래 일부가 묻혔다. 이 기단은 신라말 원통보전이 초창될 때의 것이다.
공포는 내외 3出目이다. 출목이란 안팎으로 짜 올린 공포의 층수를 말한다. 단을 이루며 벌어져 올라가는 첨차의 층에 따라 2․3․4․5출목이 된다. 외 3출목이란 공포의 층수가 건물 바깥으로 3단 벌어져 있다는 뜻이다. 이런 구조는 다포집의 일반적인 유형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공포를 기둥 위에만 구성하여 주심포적 성향을 지녔다. 그러면서도 공포의 모양은 출목을 두는 다포의 기본형이다. 昌枋(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가로재로 기둥을 버티게 하고 지붕에 얹히는 힘을 받는다) 위에 平枋도 두었다. 평방은 창방 위에 놓이면서 기둥머리를 타고 앉는다. 기둥칸살이에 설치되는 주간포를 힘있게 받치기 위한 기반적 부재로 두껍고 굵은 角材를 쓴다. 주간포를 받치는 장치이기 때문에 다포집에는 반드시 설치한다. 이점은 매우 특징적인 현상이다.
사모지붕은 마루가 한 곳에 모인다. 꼭대기에는 석탑의 상륜부와 비슷한 모양의 돌로 만든 절병이 놓여있다. 금산사 대장전의 그것과 같은 고식이다.
안에는 4개의 하늘기둥[四天柱]이 귀퉁이마다 서있다. 이는 추녀 뒷몸을 결구하기 위한 것이다. 뒤쪽 두 기둥 사이에 후불벽을 만들었다.
후불벽 앞쪽 상단에 탱화를 걸고 가운데 단에는 높이 2.8m의 목조관세음보살좌상 그 좌우에 해상용왕상과 남순동자를 모셨다. 이 목조관세음보살상은 조일전쟁 이후 법주사를 중창할 때 조성한 것이다. 원만한 상호와 적절한 비례로 인조 무렵의 보살상 중 가장 뛰어난 보살상이다.
옛날 같으면 하늘기둥이 이룬 공간의 중앙에 보살상을 안치하였을 것이다. 그때는 후불탱화는 없고 보살상에 큼직한 광배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불상이 법당의 뒤편으로 물러앉기 시작한 것은 대략 조일전쟁 이후부터이다.
천장은 우물반자이다. 닫집을 따로 두지 않고 우물 네 개를 타서 하나로 만들어 특별한 자리임을 나타냈다.
조일전쟁 후에 복원되었고 고종때 중수되었으며 1974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8-2. 희견보살상은 一切衆生喜見菩薩이 머리에 향로를 이고 있는 모습이다.
<법화경-약왕보살본사품> 에 나오는 희견보살의 소신공양의 모습이다. 희견보살이란 말은 오염을 떠나 청정한 까닭에 중생이 그 보살을 즐겨 본다는 뜻이다. 희견보살은 약왕보살의 전신으로 日月淨明德佛 시대 나서 그 부처님께 최대의 공양을 하기 위해 1200년 동안 향과 기름을 먹고 마시며 몸에 바른 후 다시 1200년 동안 자기 몸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하여 그 과보로 약왕보살이 되었다.
희견보살상은 법주사 초창기에 조성된 것이다. 仙溪山에서 바윗돌에 사지를 두드려 마다마디 부러지게 하거나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등 亡身懺을 행한 진표율사나 영심 등 극한적인 고행을 통한 수행과, 희견보살의 고행이 서로 통하므로 이런 고행상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희견보살상을 가섭존자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가섭은 미륵불이 하생할 때 가사와 발우를 미륵불에게 바치라는 수기를 받았다. 때문에 이 보살상을 발우를 받들며 여벌의 가사를 걸친 채 미륵불을 기다리는 가섭의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9. 팔상전 정면으로 사천왕석등과 대웅보전이 차례로 나타난다.
9-1.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은 통일신라시대 널리 조성된 팔각형 양식의 대표작으로 높이 3.9m이며 각 부분의 균형이 잘 잡혀있다.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법주사 초창기인 혜공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넉장의 판석으로 조합한 지대석 위에 8각의 기대석을 얹었다. 기대석 옆면에는 각각 하나씩 안상을 새겼다. 하대석은 다른 돌로 만들었는데, 8잎의 엎은 연꽃을 새겼고, 연꽃 안에는 보상화문을 장식하였다. 아래쪽에는 높은 2단의 받침이, 위쪽에는 3단의 간주석 받침이 있다.
높고 둔후한 간주석 위에 상대석을 얹었는데, 하대석과 같은 문양을 새겼다. 윗면에는 받침을 새긴 후 화사석을 얹었다. 화사석의 4면에 화창을 내고, 화창을 두른 문틀에는 문을 다는데 쓰였던 못구멍을 뚫었다. 나머지 네면에 사천왕상을 새겼다. 각기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채 악귀를 밟고 서있다. 이들은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의 활기를 느끼게 한다.
또 다른 돌로 만든 지붕돌 밑면에는 2단의 지붕돌받침과 물길을 만들었으며 꼭대기에는 2단의 원형 보주 받침을 만들었다. 보주는 없어졌다.
지금은 대웅보전 앞에 있으나 본디 용화보전 앞에 있었다.
9-2. 대웅보전(보물 제915호)은, 아래층은 앞면 7칸 옆면이 4칸이다.
윗층은 아래층 좌우 퇴칸이 반칸씩 줄어들어 6칸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7칸이기도 하다. 다포계 팔작집으로 높이가 19m, 총 28칸에 건평 170여 평에 이른다. 이만큼 커야 팔상전과 조화를 이룰 것이다. 바깥에서 보면 2층이지만 안은 통층이다. 기단과 계단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건물은 조일전쟁 뒤 중창할 때 세웠다. 1976년 해체 중수하였고, 현재에도 중수하고 있다.
3단으로 쌓은 기단 위에 댓돌을 한단 돌렸다. 기단 한 가운데 널찍한 계단을 마련하였는데 좌우에 둥글둥글한 소맷돌(돌계단 옆면을 막아 댄 널찍한 돌)을 세우고 그 가운데 넓적한 돌 석장을 나란히 하여 계단을 좌우로 나누었다. 가운데 길은 부처님을 輦에 태워 밖으로 내어 모시거나 할 때 그위로 연이 지나가도록 한 踏道이다. 소맷돌 바깥쪽에는 굵직한 넝쿨이 뻗어나가는 듯한 모습으로 연꽃과 연잎을 새겼고 소맷돌 위쪽에는 원숭이인 듯한 동물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계단석 발디디는 자리에도 연잎이 있다.
보통 어칸 좌우의 협칸의 칸살이 넓고 퇴칸이 좁은데 비해 이 건물은 협칸보다 퇴칸이 더 넓다. 이것은 위층 네귀에 기둥[隅高柱]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안쪽에 높은기둥을 두줄로 세우고 그 앞뒤로 바깥기둥을 세워 서로 연결하였다. 또 안쪽 네 귀퉁이에는 따로 높은 기둥을 세웠는데 이것이 위층에서는 네귀의 기둥이 된다. 이처럼 높은 기둥을 세우려면 퇴칸이 더 넓어지게 된다.
또 공포는 아래층은 내외 2출목인데 비해 위층은 내외 3출목으로 아래위층이 다르다. 아래층은 기둥이 매우 높기 때문에 처마를 낮추고 포작을 낮게 하여 허전함을 피하고 감싸는 맛을 높인
앞면에는 모두 살문이 달렸고 양옆면의 한칸과 뒷벽 가운데 칸에 외짝문을 달았다. 서쪽벽은 문 이외의 모든 면에 살창이 달렸다. 이 창들은 가운데 작은 기둥을 두고 양쪽의 두짝이 맞잡이로 붙은 쌍영창으로 조선 중기 이전의 양식이다. 위층은 기둥 사이를 판자로 막고 비천상을 그려놓았는데, 옛날의 그림을 보면 위층에도 살창이 달려 자연광이 비치도록 하였다.
천장은 소란반자이다. 소란반자 아래에는 건너지른 나무들이 얼기설기 얽혀있다. 불상이 커서 닷집을 화려하게 꾸미기 어렵다. 그래서 평반자로 닷집을 대신했다.
불단에는 가운데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원만보신 노사나불, 오른쪽에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을 모셨다. “화엄경”에 나오는 비로자나 삼신불은 고려 중기, 특히 조선시대 보편화되었다. 이 삼존불은 대웅전이 중창될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흙으로 빚은 이 불상은 높이가 5.5m, 허리둘레가 3.9m에 이르러 우리나라 좌불상 중 가장 크다. 이처럼 큰 불상으로는 완주 송광사 대웅전의 소조 석가여래 좌상(복장 유물과 함께 보물 제1274호)이 5.5m, 부여 무량사 극락전의 아미타불이 5.4m 등이 있다.
1976년 해체 중수하기 전에는 서까래만 있는 홑처마였는데 해체하면서 부연부분이 겹처마임이 밝혀져 겹처마로 하였다. 단청은 지금처럼 자잘하지 않고 큼직큼직했다.
이런 다포식 중층건물은 금산사 미륵전(국보 제62호),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 장흥 보림사 대웅보전, 무량사 극락전(보물 제356호), 마곡사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등이 있다. 이런 2층은 기능보다 위엄과 장엄에 뜻이 있는 듯하다. 또 이런 다층 불전 형식은 옛 백제 땅에서만 볼 수 있는 백제계 건축의 한 특징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는 대웅광명전이라 하였으나 대원군 시절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하여 미륵장육존상을 헐어갈 무렵 이름이 바뀌었다. 마땅히 대적광전이나, 대광보전이라 해야 옳다.
대웅보전 안에 괘불(보물 제1259호)이 있다. 1766년에 두흘, 마함, 사행, 지현 등 14인의 승려들이 그렸다고 한다. 길이가 14.5m에 이른다.
미륵불이라고도 하고 천장보살이라고도 한다. 보살 형태의 단독상이다. 보살상을 화에 꽉 차게 그렸다. 보살상은 양 손으로 꽃가지를 받치고 서 있는 모습으로 상체를 크게 묘사한 반면 하체는 짧게 나타냈다. 네모진 얼굴에 머리에는 山 모양의 화려한 장식이 달린 寶冠을 쓰고 있다. 양쪽 어깨를 감싼 옷은 다양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여 큼직하게 그렸다. 몸광배 안에는 꽃무늬, 구름무늬 등을 그려 공간을 채우고 있는데 옷의 화려한 무늬들과 잘 어우러져 있다. 광배 위쪽으로는 구름이 감싸고 있고 화면의 가장 윗부분은 흰 광선이 소용돌이를 이루면서 걸쳐져 있다. 전체적인 비례가 잘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중후한 느낌을 보여주며 다양한 문양과 장식, 밝고 선명한 원색과 중간색을 적절히 사용하여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대웅보전 보수공사로 2002년 5월 30일부터 2005년 12월 30일까지 국립청주박물관으로 임시 이관하였다.
10. 대웅보전 왼쪽에 진영각, 명부전, 삼성각이 있다.
10-1. 진영각에는 중앙에 개산조 의신화상과 전법초조 太古선사의 영정을 비롯하여 道弘, 坦應, 石霜, 金烏선사의 영정 등 모두 21분의 영정이 있다.
11. 대웅보전 오른쪽에 선희궁 원당이 있다.
11-1. 선희궁 원당은 담장과 솟을대문을 갖춘 유교식 건물이다.
영조(1725~1776)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暎嬪 이씨의 位牌 를 모시고 제사하는 원당이었다.
위패를 모셔간 후에는 법주사를 거쳐간 큰스님들의 초상을 모신 조사각으로 쓰였다가 1990년 대웅보전 서쪽에 진영각을 지어 옮기고, 지금은 비어있다.
12. 순조대왕 태실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는 세심정 근처에 있다.
조선 제23대 순조 임금의 胎室이 있던 곳이다. 태실은 정조 11년(1887)에 만든 것이다. 그때 이 산봉우리를 胎鋒山 또는 胎鋒이라고 이름하였고, 보은현을 보은군으로 승격시켰다 한다.
태실비는 순조 13년에 세운 것인데, 비교적 완전하게 보전되어 있다. 거북모양의 받침에 비석을 세웠는데, 비석에는 "主上殿下胎室"이라고 음각 되어 있다.
태항아리는 1927년 일제가 창경궁으로 옮겨가고 현재는 비와 석조물만 남아있다.
■ 정2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 - 내속리면 상판리
나이 600년쯤으로 추정된다. 1990년 여름 긴 장마로 뿌리가 썩고 잎이 누렇게 되고, 솔잎혹파리까지 번져 600만원 들여 건강을 회복했다. 1993년 2월 22일 바람에 이 나무를 대표하던 가지 하나가 꺾여 균형을 잃고 안정감이 없어졌다. 아들 나무 5그루가 1981년부터 뿌리를 내려 자라고 렸다.
조선 제6대 세조대왕(1455~1468 재위) 10년(1464) 왕이 병에 걸려 명산대찰을 찾아 기도하러 다니던 중 법주사로 오게 되었다. 임금이 이 소나무를 보니 처진 가지에 輦(가마)이 걸릴 것 같아 “輦 걸린다”라 말하자 곧 처져있던 가지가 저절로 들려 임금의 가마가 무사히 지나가도록 해 주었다. 임금은 이것을 기특하게 여겨 그 자리에서 정2품을 제수했다. 또 세조 일행이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비를 만나 이 소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전설도 있다.
정2품송 앞마을이 진터이다. 세조를 수행하던 군사가 진을 쳤다는 데서 진터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말티고개를 넘기 전에 대궐터라는 곳이 있는데, 세조가 여기서 묵었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말티고개는 고려 태조가 속리산에 행차할 때 닦은 고개길이라고 하며, 세조가 법주사를 갈 때 편히 지나도록 박석을 깔았다 하여 박석티라는 별명도 있다.
▴ 속리산(1,057.7m)
1. 속리산은 소백산맥 줄기의 가운데쯤에 위치하여 보은군과 상주시의 경계를 이루며 이 두 지역에 걸쳐있다.
높은 봉우리가 9개 있어 구봉산이라 불리던 것을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최치원이 신라 제49대 헌강왕 12년(886)에 속리산에 와서, 속리산이란 글자를 풀어 "道不遠人人遠道 山非俗離俗離山(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은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속과 멀라하지 않으나 세속은 산을 멀리하는구나)"라 읊었다.
속리산은 불가에서는 산의 형세가 꽃잎처럼 돋은 8개의 臺로 둘러쌓인 불국토의 형상이라 본다. 속리산은 예로부터 산 이름이 여덟개이며, 봉우리, 바위, 石門도 여덟 개씩 꼽혀왔다. 봉우리는 천황봉,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 등 여덟 개, 바위는 문장대, 신선대, 학소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봉화대, 산호대 등 8개, 석문은 내석문, 외석문, 상고내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상환석문, 추래석문 등 8개이다, 계곡에 놓인 다리도 지금은 몇 개 없어졌지만 8개를 꼽았다.
1-2. 백두대간이 백두산, 개마고원으로 함경도 중앙으로 내려오다가,
한북정맥이 나누어지는 추가령에서 동해 쪽으로 달려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을 일으킨다. 다시 남으로 내려와 태백산을 일으키고, 태백산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륙으로 내려오다가 한반도의 남쪽 중심부에 솟아난 산이 속리산이다.
천왕봉(1057.7m), 비로봉(1032m), 입석대(1009m), 경업대(1010m), 문장대(1033m), 관음봉(985m), 묘봉(847m), 상학봉(834m) 등이 북쪽으로 뻗어 충정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며 서쪽 아래에 법주사를 안고 있다.
입석대
1-3. 백두대간은 다시 천왕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어져 영남과 호남을 나눈다.
한남금북정맥은 충청북도를 거쳐 경기도 안성의 칠현산(516m)으로 이어진다. 칠현산에서 한 가닥은 북서쪽으로 올라 한남정맥, 한 가닥은 서남진하여 금북정맥을 이룬다.
1-4. 천왕봉에서 또 한 갈래가 갈라져 북쪽으로 올라가서 한남금북정맥 곧 노령산맥이 시작된다.
1-4-1, 한강의 남쪽인 한남정맥은 경기도를 중심으로 용인, 수원, 의왕, 군포, 안양, 광명, 과천 관악산을 이루고 김포를 지나 강화도 입구인 군하까지 이어진다.
1-4-2. 금북정맥은 금강의 북쪽에 위치하므로 그렇게 부른다.
곧 차령산맥이다. 금북정맥은 경기도와 충청남도를 중심으로 천안 흑성산을 거쳐 청양을 지나 대천 조금 못 미친 일월산에서 다시 북쪽으로 돌아나와 오서산, 홍성, 서산, 태안 안흥진으로 이어진다.
2. 雲藏臺란 바위가 하늘 높이 솟아 구름을 가린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세조가 속리산에 행차하여 이곳에 올라 사방의 경치를 감상하고 지은 시에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이 바위 위에 선비들을 모아 백일장을 연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 지리 전고편에 “남한강은 그 근원이 하나는 오대산 우동수 금강연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속리산에서 나온다. 아홉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산정에 문장루대가 있다. 문장루대는 천연적으로 돌이 포개져 힘차게 공중에 솟았는데 …… 그 넓이는 삼천 명이 앉을 만하다. 이 대 위에 가마솥같은 구덩이가 있는데, 물이 철철 넘쳐 가뭄에도 줄지 않고 장마에도 붇지 않는다. 이 물이 세 갈래로 나뉘어져[三派水] 반공 중에 흘러내려 가운데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낙동강이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금강이 되며,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꺾여 達川이 되어 金川으로 들어간다. 산 아래에는 여덟 개의 다리를 아홉 번 돈다는 八橋九遙가 있는데, 이 물은 법주사에 이르게 된다.”라는 말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문장대 넓이가 삼천 명이 앉을 만하다느니, 문장대에 흐르는 물이 낙동강, 금강, 달천으로 나뉘어 들어간다는 말은 모두 틀린 말이다.
문장대 위에는 크고작은 구덩이가 대략 25개 정도 있다. 구덩이들은 크고작은 홈으로 서로 연결되어 제일 위쪽 웅덩이 물이 차례로 흘러 3갈래로 나뉘어져 허공으로 떨어지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물은 三派水가 되지않고 모두 문장대 남쪽 계곡인 법주사로 흘러 달천으로 들어간다.
물이 세 갈래로 나뉘어지는 곳은 천왕봉이다.
2-1. 문장대 위에 패인 크고 작은 구덩이들은 알바위이다.
알바위에 아기를 낳게 해 달라고 빌면 천하장사를 낳는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문장대는 밑의 큰 바위 위에 보다 작은 바위가 얹힌 모습이다. 문장대 윗 바위는 ‘알독’, ‘알 도가니’로 불린다. 윗바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알이다. 알바위는 문장대 꼭대기뿐만 아니라 윗바위와 아랫 바위 사이에도 있다.
문장대는 신령한 기운이 있어 천제단이 되었다. 하늘에 제사지낼 때는 이 구덩이에 소의 피를 가득 채웠다. 이 피가 사방으로 직선을 그리며 밑으로 흘러내려 바위를 붉게 물들였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도 여기서 천제를 올렸고, 신라 선덕여왕도 다녀갔다. 고려 태조 왕건, 조선 태조 이성계도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2-2. 윗바위와 아랬바위 사이 옹달샘같이 패인 바위 홈에 감로수라 불리는 물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색깔도 탁하고 썩은 물만 고여있다. 바위 밑에서 옹달샘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밤 동안 차가워진 바위가 햇빛에 뜨거워지면서 바위 밑바닥에 생기는 물방울이 모여지는 결로현상이다.
2-3. 문장대의 윗바위의 十자를 태극무늬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곧 十자가 직각으로 굽어지면 스와스티카(Swastika)로 나치의 마크나 卍자가 된다. 十자가 곡선으로 굽어지면 S자 두개가 엇갈리는 모습으로 이것이 바로 태극(Cosmic cross)이라는 것이다. “정감록”에 나오는 弓弓乙乙은 十자와 卍자가 된다. 弓弓을 서로 반대로 세우면 亞자가 된다. 이것이 곧 十자이다. 乙乙을 엇갈리게 놓으면 卍자가 된다.
정지해 있는 十자를 원으로 돌리면 처음에는 태극무늬의 S자가 엇갈리다가 빨리 돌리면 원 속에 작은 원이 있는 모습이 된다. 이를 더 빨리 돌리면 작은 원도 없어지고 원 하나만 보이게 된다. 이것이 우주 속의 지구이기도 하고 卵生說話의 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태극무늬는 5000년 전에는 원 속에 十자가 든 모습이었다. 반구대 암각화에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十자의 세로로 패인 一자가 자연적이라면, 가로로 5~6m의 길이로 패인 一자는 사람이 판 것으로 보아 자연에 인공을 가미한 천인합작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렇게 태극무늬를 만들어 이곳이 성역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3. 천왕봉에 내린 빗물이 동쪽으로 흐르면 낙동강, 남쪽으로 흐르면 금강, 북쪽으로 흐르면 한강물이 된다.
천왕봉의 물이 바로 三派水이다. 삼파수는 達川의 상류이다. 달천은 비로봉 서쪽 해발 650m지점 상고암 팔공덕수에서 발원하여 충주시 칠금동과 가금면 창동리에 걸쳐있는 탄금교 북쪽 남한강 합수선 까지 127.9km이다.
3-1. 달천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물맛이 좋아 ‘단냇물’이 ‘달냇불’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곧 물맛이 달아 달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충주시 달천동 부근에 ‘달고달다’는 듯의 丹月洞과 丹湖寺가 있다. 또 상류에는 ‘단물’을 뜻하는 甘勿면(괴산군)이 있다.
둘째, 옛날 어느 남매가 이곳을 지나다가 소나기를 만났는데, 비에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은 누나의 몸을 본 동생이 욕정을 느끼자 자신을 부끄러워하여 스스로 자신의 남근을 돌로 끊어 자결해 버렸다. 이 내막을 알게 된 누나가 ‘달래나 보지’하며 슬퍼하였으므로 달래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누나를 업고 달천을 건넜다고도 한다. 달천 중간에 바위 두개가 있으며, 송림 서쪽 강가에 형제처럼 나란히 서있는 형제바위도 있다.
셋째 옛날 이 강에는 수달이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달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다. 인근에 수달피고개가 있으며 달천리 서쪽 물가를 ‘물개달래’라 부른다. 또 조정에 수달을 진상했다는 기록도 있다.
3-2.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속리산 최고봉 천왕봉에 大自在天王祠가 있었다고 한다.
대자재천왕은 해마다 10월 寅日 丑時에 법주사에 내려와서 45일 동안 머물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데 천왕신이 내려오는 날 속리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은 천왕신을 법주사로 모셔와 제사를 지내고 풍악을 올렸다. 이것이 옛날의 속리산 산신제이다. 이때 나무로 남근을 깎아 붉은 칠을 하여 춤을 추며 속리산 여신에게 바쳤다. 그렇게 하면 대자재천신은 속리산의 모든 산성을 지켜준다고 한다.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에 재난이 생긴다고 한다. 법주사 승려들은 이것을 인도의 남근신앙인 대자재천 신앙으로 여겨서 대자재천왕제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조선 말 법주사 승려들은 남근공의를 연희화한 송이놀이를 하였는데, 음란하다 하여 폐지하였다. 지금 속리산신제는 유교식으로 지낸다.
4. 고려말 조선 초기의 학자 騎牛子 李行(1352~1433)은 우리나라의 물맛을 평하여,
“충주 달천의 물이 제일이고, 한강의 牛重水(牛筒水)가 두 번째이며, 속리산 三陀水가 세 번째”라고 하였다. 조일전쟁때 명나라의 장수가 달천을 지나가다가 물맛을 보고 “중국 여산의 발물과 같다”고 했다고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장우신의 “煎茶水記”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차를 달이는 물을 20등급으로 나누는데, 그중 첫째가 여산강왕곡의 발물[瀑布水]라고 한다.
4-1. 삼타수는 추래암 앞의 법주약수를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
이 약수는 천황봉 계곡, 문장대 계곡, 묘봉 계곡의 물이 지하에서 합수되어 흐르므로 삼타수라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법주약수를 옻샘이라고도 부른다. 옻오른 사람이 이 물로 목욕을 하면 낫는다고 한다. 현재 냇가의 반석 위에 거대한 돌을 다듬어 ㄷ자형으로 샘을 만들어 놓았다.
삼타는 佛法僧의 三자에 아미타불의 ‘陀’자를 보탠 것이라 하여 법주사 미륵대불 아래쪽에 나오는 법주약수로 보기도 한다.
문장대 남쪽 바위 중턱의 감로수라는 견해도 있으나, 지금은 썩은 물만 고여있다.